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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롬웰 영국 대혁명
청교도 혁명으로 영국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크롬웰이 권력을 제 마음대로 휘둘렀습니다.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찰스 1세의 아들인 찰스 2세를 왕으로 세우고 잉글랜드를 정벌하려 하자, 이를 알아챈 크롬웰이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를 격파하였습니다. 찰스 2세는 스코틀랜드를 빠져나와 프랑스로 달아났습니다. 1653년 크롬웰은 군사를 이끌고 의회를 해산시킨 뒤 호국경을 취임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호국경이란 나라를 지키는 귀족이라는 뜻입니다. 크롬웰은 호국경으로서 나라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왕정은 폐지되었지만 모든 권력을 손에 쥐고 있는 크롬웰은 사실상 국왕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크롬웰 영국 대혁명
크롬웰은 그보다 앞선 1651년, 해상 무역이 발달한 네덜란드에 대항하기 위해 항해법을 발표하였습니다. 해군을 잘 훈련시키고 우수한 무기를 갖춘 영국은 영국, 네덜란드, 전쟁에서 이겨 해상권을 장악했습니다. 군함 200척 이상을 보유한 해상 강국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또한 정복 사업을 펼친 크롬웰은 잉글랜드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등 세 나라를 통치하는 자리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크롬웰의 정책이 효과를 거두고 상공업이 발달하자 영국은 큰 번영을 누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크롬웰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크롬웰이 아일랜드 정복 과정에서 무자비하게 주민들을 학살하고 독재 정치를 펼쳤기 때문입니다. 크롬웰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국민들에게 청교도의 윤리대로 살 것을 강요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왕의 독재에 반대하여 혁명을 일으킨 사람이 또다시 독재를 펼치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하였습니다. 결국 크롬웰의 시대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크롬웰 영국 대혁명
이후 크롬웰이 죽자 의회는 찰스 1세의 아들인 찰스 2세를 왕위에 앉히기로 했습니다. 기껏 왕을 없애더니 왕이 있는 나라로 다시 돌아간 것입니다, 당시 찰스 2세는 크롬웰을 피해 프랑스로 건너가 살고 있었습니다. 찰스 2세는 영국으로 돌아오기전 의회를 존중하고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해야 했습니다. 의회는 찰스 2세를 상징적인 왕으로 세우고 정치는 의회가 해나갈 속셈이였습니다. 찰스 2세가 영국으로 돌아오자 크롬웰의 독재와 엄격한 청교도 윤리에 억눌려 살았던 영국인들은 돌아온 왕을 열렬히 환호하였습니다. 영국의 왕이 된 찰스 2세는 아버지 찰스 1세의 처형을 지지했던 의원들을 처단하는 등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며 왕권을 원래대로 회복하려고 했습니다. 찰스 2세가 다스리는 동안 영국에는 전염병인 흑사병이 퍼졌습니다. 런던에서만 10만 명 가까이 죽었습니다. 환자가 의심되는 집이 발견되면 이웃들은 그 집 대문 붉은 십자가를 긋고 가족 모두 집안에 가둔 채 문을 못질해 버렸습니다. 갇힌 사람들은 흑사병에 걸리지 않았어도 굶어 죽고 말았습니다.
크롬웰 영국 대혁명
흑사병에서 벗어날 즈음인 1666년에는 런던에 큰불이 났습니다. 제빵사의 실수로 난 불은 삽시간에 걷잡을수 없는 불길이 솟아 올라 도시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후 닷새 동안 계속된 이 불로 1만여 채의 집과 교회 100여채가 불타 없어져 버렸습니다. 흑사병과 대화재가 왕의 자리를 되찾은 찰스 2세의 영광에 흠집을 내고 말았습니다. 찰스 2세는 국왕이었지만 의회의 동의 없이는 세금을 매길수 없고 마음대로 법률을 만들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찰스 2세는 프랑스에 있으면서 당시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있던 루이 14세와 프랑스 국교인 로마 가톨릭교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절대 군주를 꿈꾸며 영국을 가톨릭 국가로 돌려놓고 싶었습니다. 그의 꿈이 드러날수록 의회와 사사건건 충돌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찰스 2세의 사치스러운 생활로 왕실의 재정은 줄고 빚만 늘어났습니다. 네덜란드와의 전쟁에서 영국은 막대한 손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그리구 더구나 네덜란드를 물리치기 우해 프랑스와 동맹을 맺으면서 로마 가톨릭교로 개종하겠다는 약속을 하였습니다.
크롬웰 영국 대혁명
국민과 의회는 이런 찰스 2세를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의회는 찰스 2세의 가톨릭 부활 정책에 반대하여 심사법과 인신 보호법을 만들었습니다. 심사법은 영국 국교회를 믿지 않는 자는 공직에서 일할 수 없게 한 법이며, 인신 보호법은 사람을 부당하게 잡아 가두는 것을 금한 법이 되겠습니다. 왕과 의회와의 힘겨루기는 찰스 2세의 통치 시절 내내 계속 되었습니다. 1685년 찰스 2세는 왕위를 물려줄 자식 하나 없이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죽기 전 그는 아우인 제임스에게 왕위를 넘겨줄 것을 명령했습니다. 찰스 2세에 이어 제임스 2세가 왕위를 물려받으려고 하자 제임스 2세가 가톨릭교도여서 왕위를 물려받을 수 없다는 법안이 의회에 제출되었습니다. 제임스 2세가 영국 국교회를 인정하겠다고 맹세하였지만 의회는 제임스 2세를 왕으로 올리려는 의원들과 반대하는 의원들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왕을 지지하는 토리당은 주로 귀족과 지주로 이루어져있으며 영국 국교회를 믿었습니다. 왕을 반대하는 휘그당은 상인들의 지지를 받는 청교도들이 많았습니다. 결국 이 법안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제임스 2세가 왕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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