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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민족주의
빈 회의 이후 유럽은 겉으로 보기에는 혁명 전의 옛날 시절로 돌아간 것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혁명의 불씨가 아직 꺼지지 않아다는 것입니다. 유럽의 자유주의 세력은 왕과 귀족만 잘 먹고 잘 살던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빈 체제는 시대의 흐름을 애써 모른 척하고 옛날 유럽만 소리 높여 외치고 있는 셈이였습니다. 빈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각 나라의 정부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을 탄압하였습니다. 이러한 탄압에 맞서 유럽 각국에서는 저항이 잇따랐습니다. 1815년 독일 연방에서는 대학생들이 학생 조합을 만들어 대학의 자유와 독일의 통일을 주장하며 자유주의 와 민족주의 운동에 앞장섰습니다. 메테르니히는 이 운동을 억누르고 학생들을 해산시켰습니다.
1821년 남부 이탈리아에서 숯 굽는 사람이라는 뜻의 비밀조직 카르보나리당이 오스트리아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립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같은 해에 오랫동안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그리스에서도 독립의 물결이 일어나 결국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이 키오스 섬에는 독립을 부르짖던 수많은 사람들이 오스만 제국의 군사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유럽 곳곳의 그리스 상인들은 비밀 결사 모임을 만들어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켰고 유럽 여려 나라들이 끼어들면서 1829년 그리스는 마침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었습니다. 독립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의 독립 전쟁
유럽의 민족주의 바람을 타고 300년 가까이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아 오던 그리스에서도 독립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리스 독립으로 빈 체제는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럼 그리스의 독립 전쟁 어떻게 해서 일어났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빈 체제는 유럽 각국의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을 탄압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하지만 4국 동맹을 맺었던 러시아와 영국이 그 약속을 어기고 그리스 독립을 도왔던 것입니다. 러시아는 발칸 반도로 진출하려는 야망때문에, 영국은 이런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그랬던 것입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사실입니다. 결국 러시아와 영국은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하여 4국 동맹의 결의를 깨뜨린 셈입니다.
특히 그리스 독립 전쟁은 그리스 문화를 사랑하는 예술가들과 지신인들의 지지를 얻으며 더욱 큰 힘을 받았습니다. 영국의 시인 셀리는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라며 그리스 독립 운동에 나서자고 촉구하였으며 어느날 깨어보니 유명해졌다라는 말로 유명한 영국의 시인 바이런은 직접 독립 전쟁 한 가운데 뛰었들었습니다. 그리스 살로나 부근에 정박해 있던 오스만 제국의 함대를 격파하자 오스만 제국과 손잡은 이집트 군대가 출동하였으며 최신 무기를 자랑하는 러시아, 프랑스, 영국 연합군이 나바리노 해전에서 오스만-이집트 함대를 크게 물리치면서 이로써 전쟁의 승패가 갈렸습니다.
전력이 약해진 오스만 제국은 마침내 1829년 그리스의 독립을 승인했습니다. 그리스 독립 운동은 동유러브 그리고 비크리스트교 지역에서 처음으로 일어난 민족주의 운동이라는 점과 굳건했던 빈 체제를 흔들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처럼 서서히 독립 국가들이 나타나면서 자유주의, 민족주의를 갈망하는 시대에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프랑스 7월혁명
빈 체제에 큰 타격을 준 것은 1830년 7월에 일어난 프랑스의 7월 혁명이 되겠습니다. 당시의 국왕은 루이 18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샤를 10세였습니다. 샤를 10세는 프랑스 혁명 때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루이 16세의 동생이였습니다. 샤를 10세는 또한 왕과 귀족 중심의 옛 체제로 다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뜻을 반대하는 자유주의 세력이 의회의 의석을 많이 차지하자 출판물 검열, 선거권 제한 즉 세금을 많이 내는 부자에게만 부여하는 거였습니다. 의회 해산 등과 같은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결국 시민들은 들고일어나 샤를 10세를 내쫓고 루이필리프를 새로운 왕으로 올려 세웠습니다. 이것을 7월 혁명이라 릅니다.
부유한 시민 계급과 지신인, 일반 시민 등 혁명을 주도했던 이들은 3일 만에 승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혁명이 끝나자 프랑스 새로운 왕을 세워 왕정을 이어 갈 것인가, 왕이 없는 공화정을 세울 것인가를 놓고 국론이 분열되었습니다. 자유 사상을 가진 귀족이나 은행가 같은 상류층은 왕정을 노동자 계층은 광화정을 원했습니다. 이때 타협안으로 나온 것이 시민의 왕을 뽑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자유주의를 신봉하고 평등한 자의 아들이라 불리는 왕족 출신의 루이 필리프가 왕위에 올라 왕정을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7월 혁명은 유럽의 여러 나라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벨기에가 네덜라든로부터 독립을 하였습니다.
혁명은 그것을 끝이 아니었습니다. 프랑스는 산업 혁명과 과정을 거치면서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수가 늘어났습니다. 하지만 노동자와 하층 시민 계급의 형편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루이 필리프가 다스리던 때에도 여전히 고액 납세자에게만 선거권을 주고 가난한 노동자와 하층 시민에게는 선거권 조차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노동자와 하층 시민 계급은 선거권을 확대하라고 요구하였지만 정부는 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흉년까지 들어 주요 식품인 밀가루 값이 두 배이 상 뛰는 등 물가가 비싸지자 가난한 노동자들은 더욱 살기가 힘들었습니다. 이는 또 하나의 혁명을 야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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