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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삼부회

글로리아 2022. 1. 25.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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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삼부회가 열리다.




프랑스에는 삼부회라는 의회가 있습니다, 삼부회는 성직자, 귀족, 평민이 대표로 이루어진 신분제 의회였습니다. 삼부회는 왕의 결정을 지지해 주는 정도의 역할을 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세금을 더 거두어들여도 좋은지 왕이 물어보면 동의해 주는 정도의 일을 했습니다. 삼부회는 14세기 초에 처음 열렸고, 1614년에 열린뒤로 175년 동안 한 번도 열리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동안 왕이 마음대로 정치를 했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1789년 5월 오랜만에 열린 삼부회에 참석하기 위해 성직자, 귀족, 평민 대표들이 베르사유 궁전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삼부회가 열리자마자 세 신분의 대표들은 투표 방식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팽팽하게 맞섰습니다. 

 

프랑스 삼부회



제1신분, 제2신분 특권층은 투표방식을 예전과 같이 하자고 했습니다. 즉 1신분, 2신분, 3신분을 각각 하나로 묶어 신분별로 한 표씩 투표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성직자, 귀족, 평민 대포가 각각 한 표씩 행사한다면 성직자와 귀족이 한편이 되어 두 표로, 평민의 한 표를 누르고 이길게 뻔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평민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세금만 더 내게 될 상황이었습니다. 제3신분 대표들은 국민들 중 평민의 수가 성직자와 귀족의 수를 합친 것보다 더 많기 때문에 적어도 두 신분의 대포 수를 합친 만큼 평민의 대표를 뽑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 요구는 받아들여졌지만 사람의 수대로 한 표씩 투표하여, 즉 개인별로 투표하여 많은 사람의 의견을 따라 결정하자고 한 요구는 받아들여 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문제가 해결되 기미가 보이지 않자, 제3신분 대표들은 새로운 정치 세력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제3신분 대표들은 따로 모여 의회를 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국민의 대표라는 뜻으로 국민의회라고 멋지게 이름도 붙였습니다. 최대 권력자인 국왕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상황에서 국민의회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왕권에 도전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게다가 제1신분 하급 성직자 대표 149명도 국민의회에 합류하였습니다. 국민의회가 감히 왕에게 도전했다고 생각하니 루이 16세는 심기가 보통 언짢은 게 아니였습니다. 불안감을 느낀 귀족들도 루이 16세에게 국민의회를 억압해야한다고 다그쳤습니다. 루이 16세는 군사들에게 국민의외가 열릴 예벙이었던 회의장의 문을 닫으라고 명령했습니다.



회의장에 못 들어가자 화가난 국민의회는 회의장에서 가까운 테니스코트에 모였습니다. 테니스코드안은 자유와 평등을 향한 열망을 가득 차있었습니다. 국민의회의 초대 의장 바이이가 탁자 위에 올라 선언문을 힘차게 낭독하였습니다. 수백명의 사람들은 서로 뜨거운 눈빛을 나누며 국민의회의 손으로 새 헌법을 만들때까지 절대 해산하지 않기로 굳게 결의하였습니다. 국민의회의 대표자들은 베르사유에 흩어져 시민들에게 이소식을 전했습니다. 



시민들은 왕과 귀족들을 욕하면서 그들에게 박수를 쳐 주었습니다. 루이 16세가 신분별로 다시 모이라며 국민의회에 해산 명령을 내렸으나 국민의회가 말을 듣지 않자 왕의 체면은 구겨질 대로 구겨졌습니다. 어떻게든 잃어버린 권위를 찾고 싶었던 루이 16세는 군사를 동원하여 국민 의회를 탄압하려고 했습니다. 왕의 군대가 파리로 와서 국민의회 대표와 시민들을 마구 죽일지 모른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또 왕이 재정 장관 네케르를 쫓아냈다는 소문까지 돌았습니다. 그는 왕실의 재정 상황을 폭로하고 평민에 협조했던 사람입니다. 게다가 빵 값은 날마다 크게 올라 파리의 시민을 더 힘들게 했습니다.



국민의회가 프랑스의 오래되고 낡은 제도를 바꾸어 줄 것만을 기대하고 있던 파리의 시민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시민들은 국민의회를 지키기 위해 성난 파도처럼 들고 일어났습니다. 시민들은 자치 위원회를 구성하고 또한 시민군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무기 창고를 습격하여 총과 대포를 모으고 거리 곳곳에 방어벽을 쌓기 시작하였습니다. 시민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 왕의 군대에 맞서 싸울 준비를 했습니다. 파리 시내 곳곳에서는 혁명 전야의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육중하고 위압적인 모습으로 버티고 서 있는 바스티유 감옥 이곳은 원래 프랑스 동쪽에서 쳐들어오는 적군을 막으려고 세운 요새였습니다. 나중에는 정치범들을 잡아 가두는 감옥으로 사용되었습니다. 1789년 7월 14일 이 고요한 감옥에 시민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어왔습니다. 시민들은 바스티유 감옥 수비대와 격렬한 전투를 벌인 끝에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하였습니다. 



 이것을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시민들이 왕권에 온몸으로 저항하며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던 그 때 평소 사냥을 좋아했던 루이 16세는 그날도 한가롭게 사냥을 즐기고 있어다고 합니다. 앞으로 벌어질 엄청난 일들을 짐작조차 하지 못 한 것입니다. 파리에서 일어난 혁명의 불길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 나가 농촌 지역에서도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농민들은 자신들을 호되게 부려 먹었던 영주의 성이나 귀족의 별장에 쳐들어가 재물을 빼앗고 불을 질렀습니다. 



농민들은 그동안 자신들을 억눌러 왔던 지긋지긋한 굶주림과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기를 들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프랑스 온나라가 피로 물들었습니다. 이렇게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국민의회는 농민들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봉건제를 폐지하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루이 16세는 모든 군대를 철수시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공포에 사로잡힌 많은 왕족과 귀족들은 너도나도 다른 나라로 도망쳤습니다. 프랑스 혁명은 점점 빠르게 점점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으며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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