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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통일전쟁, 독일 통일
통일을 향한 이탈리아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배의 천 여명의 군사는 붉은 셔츠를 입었으며 배의 맨 앞에는 다른 군사들과 마찬가지로 붉은 셔츠를 입은 한 남자가 한 손에 깃발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이탈리아의 국민 영웅 가라발디입니다. 가라발디는 그 누구보다 이탈리아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노력한 사람이였습니다. 이탈리아 통일전쟁의 선두에 섰던 인물이 되겠습니다. 선원의 아들로 태어난 가라발디는 해군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조국의 통일을 위해 일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청년 이탈리아당에 들어갔습니다. 그 후 직접 통일 운동을 벌이기 위하여 의용군을 꾸렸습니다. 이 의용군은 이름이 붉은 셔츠 부대 였습니다. 뜨거운 애국심만큼이나 붉은 셔츠를 입은 군사들로 이루어진 부대였기 때문입니다.
가라발디가 이끄는 붉은 셔츠 부대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군대를 당당히 물리치고 이탈리아 남부의 양 시칠리아 왕국을 정복하였습니다. 한 편 지중해에 위치한 사르데냐 왕국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사르데냐 왕국이 이탈리아 통일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인물입니다. 에마누엘레2세는 카보우르를 수상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수상이 된 카보우르도 가리발디 못지않게 이탈리아 통일을 바란 사람이었습니다.
이탈리아 통일전쟁, 독일 통일
카보우르는 산업을 키우고 군대를 정비하는 등 나라의 힘을 길렀습니다. 그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늘 마음에 새기며 오스트리아를 몰아내고 통일된 이탈리아만 꿈꾸며 살았습니다. 1853년 흑해에서 지중해로 나아가려는 러시아와 이를 막기 위한 사르데냐, 영국, 프랑스 등의 연합군이 맞붙는 크림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사르데냐가 크림 전쟁이 참전한 것은 크림 반도에 군대를 보내면 이탈리아 통일에 프랑스와 영국이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연합군은 러시아를 몰아내고 전쟁을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카보우르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와 만나 통일을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가리발디와 협력을 다짐하였습니다. 이러한 물밑 작업을 바탕으로 사르데냐 왕국은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통일 전쟁을 벌여 승리하였습니다.
그 결과 북부와 중부 이탈리아를 통일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가리발디는 자신이 정복한 이탈리아 남부를 사르데냐왕국에 바쳤습니다. 이것은 이탈리아 통일이라는 큰 뜻을 위해 내린 결정이였습니다. 가리발디는 이탈리아가 통일하는데 큰 공을 세우고도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조용히 살명서 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정말 위대한 인물인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많은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존경받는 인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남북을 함께 모아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이 세워졌습니다. 로마와 베테치아가 빠지기는 하였지만 이탈리아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통일된 이탈리아 왕국의 탄생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약 1,400년 만에 이루어진 뜻깊은 성과 였습니다. 그 뒤 이탈리아 왕국은 오스트리아와 싸워 베테치아를 되찾았고 1870년에는 프로이센과 프랑스가 전쟁을 벌이는 틈을 타서 로마를 차지하였습니다. 이로써 이탈리아의 통일이 완성되었습니다. 통일국가 이탈리아의 출현이 되겠습니다.
이탈리아 통일전쟁, 독일 통일
그럼 이탈리아와 가까운 나라 독일의 통일에 대해서도 알아보겠습니다. 이탈리아가 통일으 향해 나아가는데 독일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독일도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같은 민족이면서도 여러 개의 작은 나라로 쪼개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독일은 빈 회의의 결정에 따라 30개가 넘는 작은 나라들과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이 독일 연방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연방하면 한 나라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각 나라의 목소리가 너무 제 각각이어서 하나의 국가라고 말하기가 힘듭니다.
프로이센은 베를린을 중심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빈 체제후 영토를 넓히면서 힘을 키워 나갔습니다. 이러한 프로이센이 중심이 되어 1834년 독일 연방 사이에 관세 동맹이 맺어졌습니다. 동맹을 맺은 나라끼리는 서로 물건을 사고팔때는 관세를 물지 않기로 약속한 것입니다. 관세 동맹이 점점 확대되면서 그동안 번거로웠던 관세 문제가 해결되자 독일 연방의 경제 사정이 나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화폐와 길이, 부피, 무게 등의 단위들이 통일되면서 같은 민족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던 것입니다.
이탈리아 통일전쟁, 독일 통일
독일 연방은 아직 정치적으로는 하나의 나라가 되지 못하였지만 관세 동맹을 맺은 여러 나라들 중 프로이센의 힘이 점점 세졌습니다. 프로이센의 맞수 오스트리아는 처음부터 관세 동맹에서 빠졌습니다. 1848년 3월 프로이센의 베를린에도 몰아쳤던 혁명의 불길은 새로운 헌법을 만들고 국민 의회를 소집하는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국와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국민 의회가 바친 황제의 관을 거부함으로써 국민의회를 해산시켜 버렸습니다. 결국 베를린의 3월 혁명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프로이센에 독일 통일의 꿈을 키워 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독일 통일의 영웅 비스마르크 입니다.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독일 통일하겠다는 마음뿐이였습니다. 이탈리아가 사르데냐 왕국을 중심으로 뭉친 것처럼 독일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1861년 형인 빌헬름 4세의 뒤를 이어 왕으로 즉위한 빌헬름 1세가 비스마르크를 불려들였습니다. 빌헬름 1세는 독일 통일에 뜻을 품은 비스마르크를 프로이센의 재상 자리에 앉혔습니다. 독일 통일의 서막이 열리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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