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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명종, 심의겸
조선시대에 이르러 양분의 수는 계속 증가하지만 관직과 경제적 특권은 한정되어 있었다. 결국 양반들끼리의 경쟁도 치열해질 수밖에 없는 현실, 오늘날 청년들의 취업난과 같다고 할까. 더구나 양반들은 생업에는 종사하지 않으려고 하고 과거를 보고 관직에만 나가려고 했기 때문에 정치와 경제적으로 균형이 있는 양반 사회를 유지하는 것을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여러 사화를 거친 후 명종 이후 다시 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던 사림파 내부에서는 정치적 대립과 갈등이 생겼다. 가만있어보자 사화의 시작이 성종 이후 연산군 때부터 였다. 연산군 때 2번의 사화가 있었고 중종반정 이후 중종이 왕위에 있을 때에도 사화가 있었다. 그때 조광조가 희생당했고 중종이후에 인종이 왕이 되었지만 고작 8개월, 그리고 왕위에 오른 명종 때에는 외척간의 다툼으로 사화가 한 번 더 일어났었다. 어쨌거나 명종 이후에 중앙무대로 다시 진출한 사림파는 내부 갈등이 심했다. 아니 어렵게 중앙에 다시 진출했는데 지들끼리 또 싸운다고 한다. 김효원을 중심으로 하는 동인, 심의겸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으로 나뉘어지면서 이것이 붕당정치의 시작이 된다. 왕권이 약해지면 정치가 어려워지고 이틈을 타서 붕당정치는 빠르게 뿌리를 내린다.
조선시대 명종, 심의겸
양반은 쌀이 떨어져도 책이다. 양반 체면에는 손에 흙을 묻힐 수도 없다. 양반은 모름지기 책을 보고 학문에 힘써야 한다, 관직에 올라 이름을 떨치는 것이 가문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것이 조선시대 양반들의 가치관이고 이념이었다. 양반은 대대로 신분을 이어받으니 양반의 수는 자꾸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관직의 수는 그대로이고 제한적이다보니 양반들이라고 해서 모두 관직에 나아갈 수 없었다. 결국에는 양반들이 관직을 사고파는 풍조까지 생기면서 양반사회의 문제점은 날로 심각해져간다. 양반들은 과거 시험을 통해서 나랏일을 할 수 있엇는데 양반은 문과, 무과에 응시할 수 있었고 중인은 잡과에 응시할 수 있었다. 한편 음서라는 특혜가 있었다. 3품 이상 고급 관료의 자제들은 시험을 보지 않고도 관직에 오를 수 있는 제도였다. 과거에 합격한 사람을 두고도 출신 가문을 따져 바꿔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야말로 양반이라는 이름아래 온갖 부정부패가 생기는 시대였다.
과거는 3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열리는 식년시가 있었고 나라에 경사가 있고나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정기적이지 않고 갑자기 보는 것을 말한다. 식년시는 한 번에 뽑는 인원이 정해져 있었다. 문과의 경우는 33명이었고 무과는 28명, 잡과는 46명이었으니 이것은 서울대 들어가는 것보다 더 힘들다. 그리고 비정기적으로 열리는 별시는 뽑는 인원이 정해져 있지 않고 매번 달랐다. 과거시험은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식년시였다. 식년주 중에서도 귀하게 다뤄진 것은 문과였다. 문과는 사무와 행정을 맡아볼 인재를 뽑는 시험으로 유교 경전을 읽고 그 뜻을 풀이하거나 자신의 생각을 글로 써내는 시험이었다. 문과는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예비 시험, 즉 1차 시험이라고 볼 수 있는 소과에 합격해야만 문과를 볼 자격이 생겼다. 사극 드라마를 보면서 들어보았을 수 있을텐데 생원, 진사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바로 1차 시험이었던 소과에 합격한 이들을 부르는 말이었다. 이들은 성균관에 머물면서 더 공부를 하고 초시와 복시, 전시 등 총 3번의 시험을 거쳐야만 비로소 진정한 관리가 될 수 있었다.
조선시대 명종, 심의겸
무과는 국방과 치안을 담당하는 인재를 뽑는 시험이었다. 시험 과목으로는 활쏘기와 같은 무예, 군사를 지휘하는 방법등이었다. 물론 이론시험도 있었다. 잡과는 하급 기술관을 뽑기 위한 시험으로 역과, 의과, 율과 등이 있었는데 역과는 오늘날의 통역관, 의과는 오늘날의 의사를 발하는 것이다. 오늘날 귀하게 여겨지고 있는 직업들이 조선지대에는 잡과로 여겨졌다. 잡과 중 의과에 합격한 사람이 잘 알려진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이다.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났다. 문정왕후는 중종의 부인이었고 자신의 친아들이 아니었지만 인종을 한 때 정성으로 보살폈으며 명종의 어머니였다. 어린 나이로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수렴청정을 하며 외척의 세력을 하늘의 새처럼 만든 인물이기도 했다.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고 직접 정치를 맡게 된 명종은 새로운 인재들을 등용했다. 또 명종의 뒤를 이은 선조는 기묘사화 때 죽은 조광조를 영의정으로 추증하기도 했다. 추증이란 나라에 공로 있는 사람이 죽은 뒤, 그의 벼슬을 높어주던 일을 말한다. 조광조가 관리를 뽑는 제도로 실시했던 현량과도 다시 설치해서 향촌에 묻혀있던 사림들을 뽑아 관리로 임명하게 된다. 그리하여 명종 때에 조선 중기에는 새로운 이들이 관직에 많이 오르게 된다. 사림들은 유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이었다. 그러니 정치에 대한 입장과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생각의 차이를 서로 존중해주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를 비판하고 상대방을 누르고 억압하려고 한다.이들 사림은 나이가 많은 기성 사림과 젊은 신진 사림으로 나누어 대립하게 된다. 아니 네번의 사화를 거치면서 그렇게 많은 희생을 당해놓고 또 지들끼리 팀을 나누어 대립하게 된다니. 사림, 영남학파, 어쩔수 없는 것인다. 얼핏보면 국회의원이랑 다른 것이 무엇이겠는가.
조선시대 명종, 심의겸
기성 사림들의 중심이 되었던 인물은 심의겸이었다. 명종의 비 엿던 인순왕후의 동생으로 27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당시 조정에서는 문정 왕후의 동생윤원형이 권력을 독차지하고 있었고 명종은 외삼촌이었던 윤원형의 권력을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심의겸의 외숙부였던 이량을 이조판서로 올리면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량은 자신의 세력을 넓히면서 새로 진출하는 사림 세력을 제거하려고 한다. 이제 명종은 심의겸을 다시 불렀다. 윤형원은 윤원형대로 이량은 이량대로 자신의 세력을 키우는 일에만 정실이 팔려있다. 심의겸은 명종의 명에 따라 이량 일파를 탄핵했고 몰아냈다. 그러나 심의겸은 기성 사림들의 지지를 한몸에 받게 된다. 동부승지, 대사간 등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기성 사림의 대표가 된 심의겸이었다. 그동안의 왕실 외척이었다면 권력을 잡으면 세도를 일삼는 일이 훨씬 많았었다. 하지만 심의겸은 외적이면서도 덕망이 깊고 높아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위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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