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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 갑오개혁
동학농민운동, 갑오개혁에 대해서 알아보자
갑신정변 이후 조선은 나라 안이 혼란스럽고 국가 재정이 어려워져 농민들은 삶은 더욱 힘들어졌습니다. 그러한 때에 전라도 고부 지방의 군수 조병갑이 마을 농민들에게 무리하게 세금을 거두어 들였습니다. 이에 화가 머리 끝까지 차오른 농민들과 전봉준을 중심으로 동학교도들이 들고 일었났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동학이란 최제우가 서양에서 들어온 천주교인 서학에 맞서 사람이 곧 하늘 이라는 사상을 교리로 삼아 만든 민족 종교입니다.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 농민군은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 황토현에서 관군을 크게 물리치고 전주성까지 점령하였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청나라가 군대를 보내자 일본도 덩달아 군대를 보냈습니다. 동학 농민군은 조선 땅에서 청나라와 일본이 충돌하는 것을 우려해 서둘러 조선 정부와 전주에서 화약을 맺고 스스로 해산하였습니다. 동학 농민군이 조선 정부와 맺은 개혁안은 탐관오리를 벌하고 신분에 상관없이 훌륭한 인재를 뽑아 쓸 것,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신분이나 재물로 사람을 차별하지 말 것, 남편이 죽은 과부를 재혼하게 해줄 것, 땅은 농민들에게 고르게 나뉘어 농사를 지을 것 등의 내용이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간 농민군은 마을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개혁안에 실천해 나갔습니다.
한편 조선 정부는 청나라와 일본에 군대를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오히려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나라를 공격하였습니다. 조선 땅에서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청, 일 전쟁에서 예상을 뒤엎고 승리를 거둔 일본은 그 뒤 속내를 드러낸 채 조선의 일에 끼어들었습니다. 동학 농민군은 일본을 물리치기 위해 다시 한 번 일어났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의 시작입니다. 하지만 신식 무기를 앞세운 일본군을 당해 내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동학농민운동은 안타깝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이 끝난 뒤 조선 정부는 교정청을 만들어 스스로 개혁을 진행해 나갔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간섭 속에서 김홍집 중심의 내각이 구성되었습니다. 김홍집 내각은 군국기무처라는 기구를 세워서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1894년에 시작된 이 개혁을 갑오개혁이라고 합니다. 청의 연호를 폐지하고 과거제를 없앴습니다. 그리고 모든 공식적인 문서에서 한문을 없애고 한글만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이는 청나라에 의존하지 않고 자주독립국가의 기초를 세우자는 뜻이 었습니다. 또한 서울에 근대식 학교를 세워 학생들을 교육하였습니다. 근대 교육을 시킬 선생님을 기르기 위한 사범 학교도 세웠습니다. 갑오개혁에서 가장 눈에 띈 점은 신분제의 폐지였습니다. 노비를 사고파는 것을 금지하고 양반과 평민을 구분하는 제도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울러 동학 농민군이 내세운 개혁 요구도 일부 반영되어 이루어졌습니다. 사실 갑오개혁은 일본의 입김이 많이 들어간 개혁이 되겠습니다. 일본은 청나라를 떼어 놓기 위해 일부러 조선의 자주독립을 들먹였고 뜻을 가진 양반들이 일본에 맞서지 못하게 하려고 신분제를 없앤 것이었습니다.
조선의 개혁에서 가장 중요한 군사제도와 토지 제도는 전혀 손을 대지 않은 것을 보아도 일본의 속셈을 잘 알수 있습니다. 갑오개혁의 내용은 대부분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보기로 삼았습니다. 조선을 일본과 똑같이 만들어 나중에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기 쉬울 것이라고 생각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후 자주독립 국가의 위신을 높이자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커지자 1897년 고종은 나라 이름을 조선에서 대한 제국으로 바꾸고 자주독립 국가임을 선포하였습니다. 황제에 오른 고종은 대한 제국을 발전시키기 위해 광무개혁을 펼쳤습니다.
군사 제도를 바꾸어 황제가 직접 군대를 지휘 하도록 하였고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여 산업을 발전시켜 잘살고 강한 나라를 만들도록 하였습니다. 그 결과 전차와 전화 등 교통, 통신 시설이 갖추어졌습니다. 하지만 일본이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자주적으로 진행되던 광무개혁은 큰 성과를 보기전에 일본의 방해로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일본은 대한 제국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내세워 결국 1905년 강제로 을사조약을 맺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습니다. 국내외에서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최익현을 중심으로 뭉친 조선의 유학자들은 의병을 일으켜 거제게 맞서 싸웠습니다. 하지만 청나라와 러시아에도 이길 만큼 강한 일본 군대를 물리치기에는 대한 제국의 의병의 힘이 너무 약했습니다. 결구 의병 부대는 일본의 강력한 군사력 앞에 처참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조선은 일본에 맞서 거세게 저항하였지만 결국 1910년 일본과 한일 병합 조약을 강제로 맺으면서 주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와같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제강점기 시대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로인해 수많은 독립투사와 민긴인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대한 제국의 자원들이 약탈되게 되었습니다.
조선의 보빙사 사절단은 조선과 미국 수호 통상 조약 체결에 따라 미국 공사 푸트가 서양의 외교 사절로는 처음으로 조선에 부임해 왔습니다. 미국의 외교 사절 파견에 보답하는 의미로 조선에서는 1883년 11명으로 구성된 보빙사 사절단을 미국에 파견하였습니다. 여기에는 홍영식, 서광범 등 급진 개화파 인물들이 참여하였습니다. 보빙사 사절단은 발전소와 전신국을 방문하여 근대 제도와 문물을 직접 확인하고 돌아왔습니다. 만약 급진 개화파의 계획대로 조선이 급격하게 발전하였다면 일본의 침략을 막을수 있지 않았나 생각이 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너무 섣부르게 개혁을 일으켜서 실패로 끝났습니다. 정말 아쉬운 부분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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