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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백일천하
1814년 나폴레옹은 결국 어쩔 수 없이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고향인 코르시카 섬 근처에 있는 엘바 섬으로 유배를 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언제가는 꼭 권력을 되찾겠다고 결심하고기회를 엿보았습니다. 마침내 1815년 나폴레옹은 아직도 자신을 따르는 부하들의 도움을 엘바 섬을 탈출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이 물러난 뒤 프랑스는 루이 16세의 동생인 루이 18세가 연합국의 지원으로 왕위에 올라 왕정으로 다시 돌아간듯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한 지 20여 일만에 파리에 모습을 나타내자 루이 18세는 서둘러 몸을 피했습니다. 이로서 루이 18세의 왕조는 맥없이 무너진 거였습니다.
나폴레옹이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유럽의 나라들은 당황했습니다. 나폴레옹이 다시 유럽을 뒤흔들까 봐 걱정이 되어 속을 태우기만 했습니다. 유럽 나라의 대표들은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하다가 영국, 프로이센, 네덜란드 등의 나라가 힘을 모아 나폴레옹의 군대에 맞서기로 했습니다. 1815년 나폴레옹의 운명이 걸린 전쟁이 벨기에 지역의 남동부 워털루에서 벌어졌습니다. 이 워털루 전투가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 나폴레옹은 온 힘을 다해 싸웠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운명은 여기까지 였습니다. 밀고 밀리는 격전 끝에 프랑스는 웰링턴 장군이 이끄는 유럽연합군에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나폴레옹은 초라한 모습으로 파리로 돌아왔습니다. 워털로 전투는 나폴레옹 최후의 전투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하여 다시 황제가 된 뒤부터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며 물러나기까지 100일정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이 다시 권력을 잡은 이 기간을 백일천하라고 합니다. 워털루 전쟁에서 패한 나폴레옹은 결국 황제라는 칭호를 빼앗기고 프랑스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섬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남대서양 한가운데 위치한 세인트헬리나 섬은 감옥 같은 섬이었습니다 덥고 습한 날씨에 깎아지른 절벽이 섬을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한 때 유럽을 정복하여 프랑스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나폴레옹은 외딴섬에 갇힌 채 1821년 눈을 감았습니다. 이로써 프랑스와 유럽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나폴레옹시대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 전쟁이 유럽을 뒤흔들면서 프랑스 혁명에서 비롯된 자유주의 정신이 유럽인들의 마음에 새겨졌습니다. 또 프랑스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민족의 단결을 중시하면서 한 민족이 하나의 통일 국가를 이루려는 움직임이 이곳저곳에서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럼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을 때 조선시대는 어땠는지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1796년 수원화성이 완공되었습니다,. 조선의 제 22대 왕 정조는 억울하게 죽은 자신의 아버지 사도 세자의 무덤을 수원의 화산을 옮겼습니다. 그러면서 수원 화성을 건축했습니다. 수원 화성은 정약용의 설계에 따라 거중기 등 새로운 첨단 기계를 사용하여 건축된 건물입니다. 수원 화성은 성곽이 지형을 따라 이어져 주변과 조화를 이루며 벽돌을 사용하여 견고하고 편안한 느낌을 줍니다. 선조들의 사상과 예술성, 지혜를 잘 보여주는 건축물이 바로 수원 화성이 되겠습니다. 수원 화성 건축의 모든 과정과 방법은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되어 있으며 수원 화성은 1997년 세게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그리고 1801년 조선의 학자였던 이승훈은 1783년 중국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처음으로 천주교를 우리나라에 전파하였습니다. 천주교는 점점 늘어났습니다. 특히 천주교의 평등사상은 낮은 신분 계층과 여성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때는 정순 왕후가 나이가 어린 순조를 도와 나랏일을 돌고 있을 때였는데 정순 왕후 쪽 사람들은 반대파를 몰아내기 위해 천주교를 탄압하였습니다. 반대파의 대부분이 사회의 변화를 추구하려는 천주교도 이거나 천주교에 호의적이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1801년 결국 이승훈, 권철신 등 천주교도들과 중국인 주문모 신부 등 100명이 처형되고 정약용 등 400여 명이 귀양을 가는 천주교도 박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신유 해에 일어나서 이를두고 신유박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후 1811년 홍경래가 난을 일으켰습니다. 몰락한 양반인 홍경래는 과거 시험에서 몇 번이나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홍경래가 평안도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조정에서 관리를 뽑을 때 평안도 출신을 차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홍경래는 이에 불만을 품고 1811년 평안도 가산에서 썩어 빠진 관리들과 조정에 맞서 난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이듬해, 정주에서 패하여 죽고 말았습니다. 소외된 계층이 중심이 되어 힘을 합쳐 들고 일어난 이 난은 조선 최대의 민란으로 그 뒤에 일어난 농민 봉기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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