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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민족운동
3.1 운동 민족운동의 시작
1900년대 초기 대한민국은 암울한 시기였습니다. 그 이유는 일본에 의해 식민지배를 받아 많은 국민들이 핍박을 받았던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미국 대통령 윌슨이 발표한 14개조 원칙의 하나인 각 민족은 스스로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민족 자결주의의 영향으로 열강이 지배하던 식민지에서 독립 요구가 거세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을 벌였습니다. 바로 모두가 알고 있는 3.1 운동이 되겠습니다. 민족대표들은 종로 태화관에서 학생들은 탑골 공원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여 일본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겠다는 뜻을 알렸습니다. 3.1 운동은 학생, 농민, 여성 등 전국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민족 운동이 되겠습니다. 이날 거리에는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로 붐볐으며 석 달 동안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이를 본 일본은 무력으로 만세 운동을 벌이던 사람들을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고 고문을 하며 목숨을 빼앗았습니다. 가혹한 탄압이 이어지자 무장 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3.1 운동 이후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세워지게 됩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초대 수장은 이승만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임시 정부는 조직적으로 일본의 지배에 맞서는 독립운동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만주 지역에는 홍범도가 거느린 대한 독립군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크게 승리 하였으며 김좌진 장군이 지위하는 북로 군정서는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청산리 대첩이 되겠습니다.
1912년 중국에서는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세워졌습니다. 중화민국의 대총토에 오른 위안스카이는 독재 정치를 펼쳤습니다. 위아스카이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뒤에는 군인들이 권력을 다투는 군벌 시대가 펄쳐졌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열린 파리 강화 회의에서 일본이 1915년에 중국에 강요한 21개조 요구가 인정되고 패전한 독일이 중국에서 차지한 권리를 일본에 넘긴다는 협약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소식을 듣게 된 중국인들은 크게 분노하였습니다. 1919년 5월 4일 베이징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일본의 부당한 요구와 이에 끌려다닌 군벌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이들은 이본이 점령한 산둥 반도 반환, 21개조 요구 철폐, 권력 싸움만 일삼는 군벌 타도를 주장하면서 일본을 중국 땅에서 몰아내자고 목소를 높였습니다.
노동자와 상인들까지 힘을 합쳐 일본의 횡포와 부패한 군벌에 항거한 이 운동을 5.4 운동이라고 불렀습니다. 5.4 운동은 걷잡을 수 없이 거세어지자 중국 정부는 친일 관리를 내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5.4 운동 계기로 중국에서는 공산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중국 공산당이 조직되었습니다. 그리고 중국 혁명가 쑨원도 중국인들의 투쟁 열의에 힘을 얻더 중국 국민당을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1924년 쑨원이 이끄는 국민당은 공산당과 힘을 모아 일본과 중국 군벌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싸움을 벌였습니다. 이것을 제1차 국. 공합작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쑨원은 중국의 혁명을 완성하지 못하고 1925년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쑨원이 죽은 뒤 국민당의 군사령관 장제스가 국민당을 이끌게 되었습니다. 공산당 세력이 중국에서 커지는 것을 걱정한 장제스는 공산당과의 협력을 깨고 공산당을 몰아내기 시작하였습니다. 장제스가 바로 훗날 자본주의 초석을 다진 대만을 세운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럼 동아시아 다음으로 서아시아의 민족 운동에 대해서도 알아보겠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동맹국 편에 섰다가 패배하면 과거의 영광을 뒤로하고 약소국이 되었습니다. 위기에 빠진 오스만 제국에서는 민족의 운명을 구하기 위해 케말 파샤의 지도로 애국 운동이 펼쳐졌습니다. 케말 파샤는 마지막 황제 메흐메트 6세를 자리에서 밀어내고 1923년 터키 공화국을 세웠습니다. 터키의 시작은 이때부터 입니다. 초대 대통령이 된 케말 파샤는 이슬람 종교 지도자들이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종교와 정치를 분리 시켰습니다. 또한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으며 아시아 최초로 남녀평등 선거를 시항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영국의 보호국이 되어 내정 간섭을 받던 이집트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영국의 보급 기지가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이집트는 지식인을 중심으로 독립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1922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았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서아시아의 아랍 민족은 영국을 도와 오스만 제국과 싸우면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오스만 제국으로 부터 독립을 시켜 준다는 영국의 약속을 믿고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아랍의 독립을 모른 척했습니다. 아랍 지역은 영국과 프랑스가 국제 연맹의 위임을 받아 통치했습니다. 위엄 통치는 식민지로 삼아 다스리는 것과 크게 다를게 없었습니다. 이에 불만을 갖은 아랍 민족은 독립 운동을 펄쳐 나갔고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등의 아랍 국가들이 독립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한편 영국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필요한 자금을 동원하기 위해 금융 자본을 쥔 유대인에게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 국가를 세우도록 돕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영국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아랍 민족과 유대인 모두에게 독립 국가를 약속한 것입니다. 영국의 일관성 없는 정책으로 팔레스타인을 둘러싼 유대인과 아랍 민족의 분쟁이 오늘날가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는 영국의 잘못된 정책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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