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history

기묘사화 조광조

글로리아 2022. 1. 16. 15:37
반응형

기묘사화 조광조

중종때 활약했던 조광조가 있었습니다. 조광조는 새로운 개혁 정치를 많이 추진했지만 생각보다 실천이 되지 않았고 기묘사화로 생을 마감한 안타까운 인물입니다. 조광조가 추진했던 개혁정치에 관해서는 역사 시험에서 자주 출제되고 있습니다. 조광조는 먼저 현량과를 실시했고 중종반정에 공은 세운 신하 명단 중 76면을 삭제합니다. 왕의 권한을 줄이고 백성들 위주의 왕도 정치를 실현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조광조가 개혁한 정치 중에서 중종반정 때 공을 세운 신하의 명단이 삭제된 일이 있었는데 이때 훈구 세력들이 반발하게 됩니다. 그동안 부를 누리고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명단이 삭제되면서 자신들의 토지와 노비가 몰수당하게 되니 당연히 조광조를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훈구 세력들은 음모를 꾸미게 됩니다. 나뭇잎에 '주초위왕'을 새기게 하고 꿀을 발라 벌레가 그 부분만 갉아먹게 만듭니다. 주초의 한자를 합치면 성씨 조가 나오고 여기에서 조는 조광조를 의미합니다. 그들의 음모는 조광조가 역모를 꾸며 중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려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중종 역시도 처음에는 조광조가 좋았지만 왕의 권한을 자꾸 줄이고 왕도 정치를 해야한다는 조광조가 점차 싫어졌던 것도 사실입니다. 중종은 훈구파의 꾀임에 넘어가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대부분을 제거하게 되는데 이것이 1519년에 일어난 기묘사화입니다. 이때 조광조도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기묘사화 조광조



연산군 때는 사화가 2번 일어나는데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였습니다. 중종 때는 기묘사화가 일어나지요. 중종 이후 왕위에 오른 사람은 인종이었습니다. 하지만 신하들은 인종이 아닌 경원대군을 왕위로 올려야한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중종의 첫째 아들은 인종이었지만 현대 중전마마는 경원대군의 생모인 문정왕후였습니다. 즉 첫째 아들인 인종이 왕이어야하느냐, 경원대군이 왕이어야 하느냐를 두고 그들의 외삼촌끼리 싸움을 시작합니다. 자신의 조카가 왕이 된다면 당연히 막강한 권력과 부를 가질 수 있게 되니까 말입니다. 대윤은 인종(중종의 첫째 아들)을 지지하는 파를 말하며 인종의 외삼촌으로 윤임 일파라고 합니다. 반대로 소윤은 명종(경원대군, 인종이 8개월만에 세상을 떠나서 왕위에 오르게 된다.)의 외삼촌으로윤원로와 윤원형이 있습니다. 이들끼리의 싸움, 즉 대윤과 소윤의 싸움이 또하나의 사화를 일으키게 됩니다. 을사사화는 대윤과 소윤, 외척간의 세력 다툼으로 승리는 소윤이었습니다. 이유는 대윤파였던 인종의 외삼촌들은 인종이 왕위에 오른지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기에 막강한 힘이 없었습니다. 을사사화는 명종의 외삼촌이었던 윤원로와 윤원형의 승리로 끝나며 인종의 외삼촌이었던 대윤파 윤임을 비롯하며 100명이 죽음을 당하거나 화를 입은 사건입니다.


중종 때 기묘사화로 희생된 조광조


조광조는 인과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왕도 정치를 꿈꾸었고 과괌하게 개혁 정치를 펴나갔던 인물입니다. 대쪽으로 소문이 자자한데 이는 고집이 센 사람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특히 율곡 이이가 상당히 높게 평가한 사람이 조광조입니다. 율곡 이이는 지금의 성리학이 있게 된 것은 모두 조광조의 힘이다라고 평가했습니다. 최고의 성리학자였던 율곡 이이 선생이 '경연일기'라는 책에서 그렇게 평가했습니다. 조광조는 중종 임금께 특별히 뽑혀서 정치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조광조가 주장한 왕도 정치란 하늘과 사람, 임금과 백성이 일치해야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왕도 정치가 이루어지려면 신하의 뜻이 임금과 통해야하고 신하들이 임금께 소신껏 자신의 뜻을 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렇게 좋은 뜻을 가지고 있던 조광조였지만 그의 뜻을 제대로 펼칠 수 없었던 것은 역시나 훈구파 때문이었습니다.



중종은 연산군을 몰아내고 진성대군이었던, 성종의 둘째 아들이었던 그가 왕으로 오를 수 있었던 중종반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중종반정을 일으킨 것들이 훈구파였는데 중종을 왕으로 세운자들을 공신으로 우대하고 많을 혜택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에 참여하지 않고 혜택을 받고 있던 가짜 공신들이 76명이나 있었습니다. 조광조는 이들에게서 공신 자격을 박탈하였고 많은 공신들이 명예와 재산을 잃게 됩니다. 조광조에세 앙심을 품은 훈구파가 일이킨 것이 기묘사화입니다. 조광고는 귀양을 가게 되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물론 조광조에 대한 평가는 다양합니다. 아직 젊은 나이였고 정치 경험이 많지도 않았음에도 이상적인 정치를 펴겠다는 의지가 너무 강한 것이 오히려 독이였다는 평가를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자신과 조금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는 이들과 타협을 하지도 못했습니다. 너무 급진적인 개혁이라고 비판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나라와 백성을 위한 마음만은 진심이었다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반응형

'hi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닉슨 독트린  (0) 2022.01.18
나폴레옹 대륙봉쇄령  (0) 2022.01.17
국제연합 미국 9.11 테러  (0) 2022.01.15
공화정 선포, 베르사유 조약  (0) 2022.01.14
경주 여행 다양한 문화재  (0) 2022.01.14
댓글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링크
TAG
more
«   2024/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