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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순보 독립신문
한성순보는 정부에서 세운 박문국이라는 출판 기관에서 발행하였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신문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신문은 1883년에 창간되었고 열흘에 한 번씩 발생하여 나라의 소식을 전하고 서양의 새로운 문화를 소개했습니다. 한성순보는 1886년에 한성주보로 바뀌었으나 1888년에 폐간되고 맙니다. 미국에서 독립 운동을 하던 서재필이 조선으로 귀국하여 1896년에 독립신문을 창간했는데 독립신문은 민간에서 발생한 최초의 신문으로 한글로 발행하였습니다. 순 한글로 되어 잇으면 누구나 쉽게 신문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서재필이었으며 그는 1951년까지 생존하였습니다. 독립신문은 영문으로도 발행이 되어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의 사정을 알 수 있도록 하였으나 독립협회가 해산되면서 1899년에 폐간되고 말았습니다. 3년만에 사라진 신문이었습니다.
대한제국 말기 민족의 독립과 국권 회복을 위해 만들어진 민족 신문에는 종류가 꽤 많습니다. 대한매일신보, 대한민보, 제국신문, 만세보, 황성신문 등이 있었는데요 황성신문은 1898년 남궁억을 대표로 하여 유학자들이 창간하였습니다. 황성신문은 한글과 한문을 섞어서 발간하였고 애국적인 내용을 실어 민족 정신을 살리는데 목적을 두었습니다. 일본의 침략에 맞서 사회를 개혁해야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재정이 어려워서 신문이 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말았습니다. 장지연, 박은식, 신채호 등이 논설 위원으로 참여하였습니다. 신문사들이 자금이 부족해서 신문을 펴내지 못하게 되자 고종은 신문값을 지불해 문 닫는 신문사가 없도록 하였고 자금 뿐만 아니라 신문사로 쓸 건물까지 내주기도 하였습니다. 1905년 일본은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아 가기 위해 을사조약을 맺게 됩니다. 이에 황성신문 주필이었던 장지연은 을사조약을 비난하는 논설을 썼습니다. 잘 알려진대로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입니다. 시일야방성대곡은 이날을 목 놓아 크게 우노라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서 이 말은 듣는 지금에도 우리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를 접한 온 국민의 가슴은 나라 잃은 슬픔과 분노로 가득차게 됩니다. 논설을 썼다는 이유로 장지연은 70여일 동안 경무청의 유치장에 갇혀있어야 했고 황성신문은 80여일 동안 발행이 중단되게 됩니다. 1910년 황성신문은 한성신문으로 이름을 바꾸지만 이내 폐간되고 말았습니다. 유치장에 갇혔던 장지연에게 다시는 그 따위 글을 쓰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라고 일본은 강요했으나 장지연은 죽는 한이 있어도 마른 글 쓰기를 멈추지 않겠다고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제국신문은 이종일이 창간하였으며 그때가 1898년이었습니다. 순 한글로 발행했기 때문에 하층민과 부녀자들이 즐겨읽었습니다. 제국 신문 역시도 재정난으로 인해 몇 번씩 휴간을 하였는데 고종은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는 언론 기관의 활동을 지원하였습니다. 허나 일본이 이를 가만히 둘리가 없었지요. 발행인은 보증금을 납부하고 신문은 발행 전에 검열을 받도록 한다! 이것이 일본의 주장이었습니다. 국민에게 한굴의 중요성과 지식을 주었던 제국신문 역시도 결국 일본의 끈질긴 탑안으로 1910년에 폐간되고 말았습니다. 일본에 맞선 대한 매일신보도 있습니다. 그 중 우리가 꼭 기억해야할 사람이 있는데 1872년 ~ 1909년까지 살았던 영국의 언론인 베델입니다. 베델은 독립운동가면서 언론가였던 양기탁을 찾아가 신문을 함께 만들어보자고 제안하였으며 민간 신문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라 양기탁은 반가운 마음으로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영국 데일리 뉴스지의 기자였던 베델은 러일 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왔다가 1904년에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게 됩니다. 대한매일신보는 영국인이었던 베델이 창간하고 발행하였으므로 다른 신문보다 일본의 감시를 덜 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덕분에 황무지 개간권 반대 운동, 국재보상운동을 주도할 수 있었고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주장하면서 일본인을 비판하는 기사를 자유롭게 실을 수 있었습니다. 일본은 머리 끝까지 화가 났지만 일본이 영국과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함부로 체포할 수가 없었고 대신에 신문의 주필이었던 박은식을 구속하게 됩니다. 하지만 베델의 노력으로 박은식은 쉽게 풀려날 수 있었고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의 검열을 무시한 채 신문 활동을 계속하게 됩니다. 이에 일본은 베델을 일본인 배척 선동죄로 고소하고 총무 양기탁은 국채 보상금 횡령죄를 뒤집어 씌워 체포합니다. 양기탁이 국채 보상금을 가로챘다고 누명을 씌운 것이었습니다. 대한매일신보는 꿋꿋하게 버텼지만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나라를 빼앗기게 되면서 경영권이 일본으로 넘어갑니다. 일본은 대한매일신보를 매일신보로 바꾸었고 조선 총독부의 기관지로 탈바꿈 시킵니다. 조선 총독부는 1910년에 일본이 강제적으로 조선을 병합하고 조선을 다스리기 위헤 세운 통치기구 입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들려고 했을 때 국민들이 여러 운동을 하였던 것처럼 언론기관의 활동도 있었습니다.
이를 다시 한 번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성순보는 최초의 근대신문으로 1883년에 박문국에서 순 한문으로 펴냈습니다. 박문국은 나라에서 만든 기관이었으며 한문으로 펴냈다는 점에서 안타까운 점이 있습니다. 국내 소식과 함께 서양의 새로운 문화를 소개하였지만 한문으로 썼기 때문에 하층민이나 부녀자들은 읽기 힘들었고 1886년에 한성주보로 바꾸지만 2년 뒤에 폐간되고 말았습니다. 최고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도 등장합니다. 1896년에 독립협회의 서재필이 창간한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며 순 한글신문이었고 영문판도 함께 발간되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독립협회가 해산되면서 1899년에 폐간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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