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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인권 선언

글로리아 2022. 1. 26.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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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인권 선언을 발표하다.


국민의회는 혁명의 불길이 전국을 번져 나가자 혁명의 참뜻을 알리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국민의회는 1789년 8월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으며 나라의 주권은 왕이 아닌 국민에게 있다라는 내용을 17개 조항에 담아 엄숙히 선언하였습니다. 이를 인간과 시민에 관한 권리 선언이라고 하며 간단히 줄여서 인권 선언이라 말합니다. 또 구체제의 사망 확인서로 부르기도 합니다. 프랑스 인권 선언은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국민에게 주권이 있다고 선언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보입니다. 또 근대 민주주의 발전의 기틀을 마련해 뒷날 세계 여러 나라의 헌법과 정치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프랑스 혁명 인권 선언



루이 16세는 국민 의회가 채택한 인권 선언을 인정하지 않고 버텼습니다. 성직자와 귀족들은 그들 스스로 특권을 포기하겠다고 국민의회와 합의 했는데 이것도 루이 16세는 거부하였습니다. 가재는 게 편이가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그들을 지켜 주어야 자신도 지킬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루이 16세가 폭력을 국민의회를 해산시키기위해 은민하게 용병을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상징하는 삼색 휘장이 짓밟히는 일도 생겼습니다. 그러자 그 소식을 전해 듣고 흥분한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당시 흉년이 계속되어 곡물 값마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상태라 민심은 나쁠 대로 나빠져 있었습니다.



 특히 화가난 여자들은 베르사유 궁전으로 몰려가 빵을 달라고 소리쳤습니다. 용감하게 앞장선 여자들의 뒤를 따라 남자들도 함께 행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도 루이 16세는 사냥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베르사유 궁전으로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보고 받은 루이 16세는 서둘러 궁전으로 돌아왔습니다. 시민들은 잔뜩 겁을 먹은 루이 16세에게 인권 선언을 인정하게 한 뒤 강제로 파리로 데리고 왔습니다. 이제 루이 16세와 왕비, 왕세자는 튈르리 궁전에서 살면서 시민들의 감시를 받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인권 선언을 발표한 뒤 국민 의회는 여러 가지 개혁을 실시하고자 했습니다. 



먼저 나라의 재정 적자를 메우기 위해 교회의 막대한 재산을 강제로 빼앗았습니다. 또 모든 성직자는 국민과 왕과 헌법에 충성할 것을 맹세하게 했습니다. 국민의회가 해야 할 또 한 가지 중요한 일은 테니스코트의 서약에서 맹세한 것처럼 새로운 헌법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국민의회는 자신들이 헌법을 만들고 왕은 헌법에서 정한 범위 안에서만 나라를 다스리는 입헌 군주제, 재산 정도에 따라 선거권을 주는 제한 선거 등의 내용을 담은 새 헌법을 만들었습니다. 국민의회는 새 헌법에 따라 입법 의호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물러났습니다. 



어느 날 새벽, 튈르러 궁전에서 한 대의 마차가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왔습니다. 마차는 덜컹거리며 쉬지 않고 달려 파리 동쪽의 국경 근처에 있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마차 안에는 모자를 푹 눌러쓴 평범해 보이는 한 가족이 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차 안의 가족은 곧 사람들에게 붙잡혀 되돌아와야 했습니다 이들은 바로 루이 16세와 마리앙투아네트 였습니다. 루이 16세와 왕비와 함께 처갓집 나라인 오스트리아로 몰래 도망치려하다가 붙잡혀 왔다는 소식을 들은 프랑스 국민들은 왕과 왕비를 더욱더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흥분한 사람들은 왕은 이제 필요 없다고 목소리리를 높였습니다. 국외로 도망치려던 계획이 실패하자 마리 앙투아네트는 실의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오빠인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열심히 편지를 썼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머지않아 오스트리아도 혁명이 일어날 테니 연합군을 모집하여 자신을 구하러 와 달라는 편지였습니다. 루이 16세도 다른 나라의 도움을 받아 혁명 세력을 물리칠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프로이센의 왕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두사람은 다른 나라의 힘을 빌려서라도 혁명 세력을 누르고 왕이 다스리는 나라로 되돌리려는 생각이였습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편지를 받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일시적인 폭동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라도 혁명의 불길이 자기 나라에 번질까 봐 걱정했습니다. 동맹을 맺은 두 나라는 대군을 이끌고 프랑스로 향하였습니다. 프랑스 의회가 이들 나라에 전쟁 선포하면서 혁명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영국군에게 져 온 프랑스군은 아니나 다를가 번번히 지기만 했습니다. 오스트리와 프로이센 연합군은 워낙 그 수 가 많은 데다가 프랑스군은 미처 대비하지 못한 채 전쟁에 나섰기 때문인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러한 위급한 상황은 프랑스 국민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였습니다.



의회가 전국에 군인을 모집한다고 알리자 전국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나라를 지키겠다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젊은이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고 그들의 마음은 조국에 대한 사람으로 뜨거웠습니다. 마침내 프랑스 젊은이들은 외국 군대를 몰아내고 프랑스를 지키고 말았습니다. 그후 루이 16세는 국민 의회가 만든 새 헌법을 받아들이고 헌법을 충실히 지키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그런데 시민들은 새 헌법을 포함된 입헌 군주제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즉 더 이상 왕이 다스리는 나라를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입법 의회 의원 가운데 로베스피에로같은 인물도 왕을 물러나게 하고 공화제를 시행하자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로인해 마침내 시민들은 튈르리 궁으로 쳐들어갔습니다. 시민들의격렬한 시위로 왕권은 정지되어 루이 16세는 프랑스의 국왕이 아닌 평민 루이가 되고야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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