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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나라 조선 왕조의 건립

글로리아 2022. 3. 12.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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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나라 조선 왕조의 건립





고려 말에는 권문세족의 비리와 횡포 외적의 잦은 침입 등으로 인해 나라의 국력이 많이 쇠퇴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요동을 공격하라는 왕의 명령을 받고 출정에 나섰던 고령의 장수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왕을 몰아내고 왕이된다. 이로써 그 찬란한 왕조 고려 왕조는 무너지고 새로운 왕조에 의해 조선이라는 나라가 세워진다. 이성계는 새로운 나라의 이름을 조선이라고 했는데 이는 고조선의 뜻을 이어받겠다는 뜻에서 나왔다고 한다. 



이성계는 1392년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민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는데 나라의 이름은 조선 수도는 한양으로 지정하였다. 조선의 첫 번째 왕 태조 이성계는 세 가지의 정책을 기본으로 삼아 나라를 다스렸다고 한다. 첫째는 사대교린이다. 이는 큰 나라를 받들어 섬기고 이웃나라와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말하여, 특히 조선을 명나라의 눈치를 많이 봤다. 둘째는 승유억불이다. 이는 조선의 유교문화를 장려하고 반대로 불교를 억압하였다. 셋째는 농봉정책이다. 농사를 기본으로 삼는 정책으로 황무지 땅을 개발하여 농사를 장려하는 정책의 일환이다. 


새나라 조선 왕조의 건립


피를 부르는 왕자의 난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당시 이방원은 아들로서 그의 곁에서 많은 공을 세운다. 하지만 세자로 책봉이 되지않아 피를 부르는 참극이 일어나고 만다. 그 당시 태조 이성계는 많은 고심 끝에 두 번째 부인의 아들인 의안대군을 세자로 삼았다. 이는 이성계가 신덕왕후를 아꼈으며 때마침 정도전등도 의안대군을 추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반기를 들은 이방원은 나름 야심도 컸고 조선 왕조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불만을 삼습니다. 



정도전의 생각에는 의안대군이 왕이되어야 한편으로는 자기마음대로 나라를 음직일 수 있으며 왕권과 신권을 조화가 이루어진다고 생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를 눈치챈 이방원은 동생 의안 대군을 가차없이 죽이며 반기를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당시 왕족과 공신들은 저마다 사병들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정도전은 사병들을 없애려고 했습니다. 왕족과 공신들의 힘을 무력화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반대한 이방원은 첫 번째로 정도전을 사살하고 동생 의암대군을 죽입니다. 그 이후로 이방원의 형이 왕권을 받게 되는데 이사람이 바로 정종입니다. 조선의 2대왕으로서 말만 왕이지만 힘이 없는 왕이었습니다. 동생 이방원의 눈치를 보면 결국에는 왕권을 내주게 됩니다. 결국에는 피로써 모두를 이방원이 3대왕에 오르게 됩니다. 바로 태종이방원입니다. 

새나라 조선 왕조의 건립



나라의 기틀을 마련한 왕

한편으로는 피를 부르는 싸움으로 왕에 올랐지만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조선이 정도전의 설계로 세워졌다면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고 뼈대롤 완성한 것 태종 이방원입니다. 조선의 또다른 기틀 호패법을 실시하였는데 태종은 당시 전국의 남성 인구를 파악하여 병사를 모집하거나 나라의 큰 공사를 위해 호패법을 실시하였다. 오늘날 주민등록증과 비슷한 호패법은 조선시대 신분증이다. 



가부장적 가족 제도의 확립

조선이라는 나라는 참으로 가부장적인 나라로 유명합니다. 아직도 우리사회에는 뿌리깊게 박힌 부분도 남아있습니다. 조선초기에는 고려시대와 같이 남성평등 사회였습니다. 아들과 딸 차별없이 공평하게 대했으며 재산도 공평하게 나누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가족 제도는 조선이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으면서 점점 변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성리학이라하면 중국의 춘추시대에 공자의 가르침을 배우는 전통 학문인 유학이 발전하여 탄생한 것입니다. 성리학에서는 맏아들이 제사와 재산 상속에서 우월할 권리를 가지고 다른형제들을 통솔해야 한다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이는 곧 남녀차별 시대로 저물벼 가부장적인 시대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러한 성리학 사상을 강력하게 믿은 태종은 가부장적 제도를 확립합니다. 


새나라 조선 왕조의 건립


조선의 제왕 우리 민족의 문화를 꽃피운 세종대왕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이 조선을 건국하는데 큰 힘을 발휘한 국왕이라면 왕권 강화 및 기반을 굳게 다진 임금은 바로 세종대왕입니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하였고, 각종 신물 기기들을 발명하였으며 많은 사적들을 편찬하여 우리민족의 문화를 꽃피우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조선의 가장 큰 발견

바로 훈민정음입니다. 세종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고 해서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평소에 백성을 사랑하고 아낀 세종대왕은 백성들을 위해서 어려운 한자보다 더욱더 사용하기 쉬운 한글을 만들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세종은 새 글자를 연구할 수 있도록 궁궐안에 정음천을 설치하고 집현전 학자들에게 훈민정음의 부족한점을 연구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 신하들의 많은 반대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한자의 우월함을 더 중시하였고 아무나 글자를 알면 한편으로는 기득권 세력에게는 위기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종은 백성이 까막눈이면 이 나라 역시 까막눈이 되니 절대 그렇게 할수 없다고 대신들과 많은 공론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참으로 백성을 생각한 왕다운 왕입니다. 


새나라 조선 왕조의 건립


드디어 1446년 용비어천가를 통해 훈민정음을 반포합니다. 이로인해 백성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한자를 사용하던 양반들은 훈민정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일반 백성이나 부녀자들에게 쓰여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한글은 과학적인 글자로 처음 창제당시에는 자음17자, 모음11자로 모두 28였지만 오늘날에는 총 24가 되었다고 합니다. 훈민정음으로 책을 발간하는데 이는 농사기술인 서적 농사직설입니다. 농사기술을 백성들이 쉽게 이해하고 쓸수 있게 발간하였다고 합니다. 



세종대왕의 사랑을 한몸에 받은 학자 장영실

장영실에 삶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어디에서도 찾아볼수 없습니다. 아마도 그의 신분이 처음에는 노비였기 때문일거라고 합니다. 다만 그의 아버지는 원나라 사람이고 어머니 또한 기녀 출신이라고 기록에 남겨졌다고 합니다. 노비의 신분인 장영실은 어릴때부터 영특하고 천재성을 뛰었지만 신분의 한계로 인해 아무것도 할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태종 이방원 시절 때 궁중 기술자로 발탁되어 궁중에서 일을 하게 되는데 이때 세종대왕을 만났다고 합니다. 손재주가 워낙 좋은 장영실을 보고 감탄한 세종대왕은 노비의 신분을 벗어나게 해주며 정식으로 과학의 발전을 위한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로인해 1434년 자격루를 완성하고 그 공로를 인정하여 정 4품 벼슬에 올라 더 나아가 3품까지 올랐는데 이는 신분사회였던 조선시대에서는 파격적인 사건이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새나라 조선 왕조의 건립


민족의 문화를 꽃피운 세종 

집현전의 활성화이다. 우수한 인재를 육성하고 활성화하기 위해 집협전을 운영하였는데 이는 우수한 학자를 한곳에 모아 학문연구에 힘쓰게 함으로써 훌륭한 학자양성과 연구의 산실로 삼았습니다. 



훈민정음의 탄생배경

탄생 목적은 중국의 글자인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의 불편을 덜어 주기 위해 우리 고유의 글을 만들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창제 시기는 1443년으로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이 총 28자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문자의 반포는 3년뒤에 조선건국의 우수함을 말한 용비어천가 등을 실어 반포하였습니다. 훈민정음의 훌륭함은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근거로 만들어졌으며 누구나 쉽게 배울수 있으며, 기억하기 쉬우여 익힐 수 있다는 겁니다. 훈민정음으로 인해 백성들의 삶이 편리해졌으며 우리 민족 문화의 발전에 바탕에 되었습니다. 


새나라 조선 왕조의 건립


조선의 새로운 피바람 세조

1450년 세종대왕이 승하하고 그 뒤를 이어 문종이 왕이 되지만 워낙 몸이 병약해서 얼마되지 않아 2년 있다가 그 역시 병으로 승하하게 됩니다. 그 뒤를 이어 어린 왕 단종이 왕위를 계승하게 됩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세종대왕의 또 따른 자식 수양대군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학자들과 신하들을 참수하고 결국 단종까지 죽이게 됩니다. 피로 인해 왕위 계승을 받아 의롭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세조는 왕권을 강화하고 잘못된 여러제도를 정비하고, 나라는 다스리는 기본법전인 경국대전을 편찬하는 등 공로가 깊습니다. 



경국대전의 재미있는 조항들

-생활이 어려워 서른 살이 되도록 시집 장가를 가지못하는 집안의 딸들에게는 왕에게 아뢰어 혼인비용을 적당히 보태준다.



-나룻배는 5년이 되어 수리하고 10년이 지나면 새로 만든다.



-아무리 죄인이라고 하여도 마음대로 고문하면 안 되며, 3일 이내 2번 고문하는 것은 금한다. 곤장을 때릴때에는 1번에 30대 이상 때리면 안된다.



우리가 생활하는데 필요한 조항들이다. 어찌보면 세조 역시 백성들을 참으로 아끼고 사랑한 왕인 것 같습니다. 


새나라 조선 왕조의 건립


명과의 외교

우리나라는 예전부터 중국의 간섭을 받아왔습니다. 삼국시대에는 당나라, 고려시대에는 원나라가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명나라, 청나라에게 외교적으로 많은 간섭을 받는 처지였습니다. 특히 조선은 주변을 둘러싼 다른 나라를 대할때에는 사대교린 정책을 썼습니다. 이는 큰 나라는 받들고, 국력이 비슷하거나 작은 나라와는 친하게 지낸다는 뜻을로 당시 명나라는 조선보다 부강한 국가여서 사대교린에 의해서 명나라를 섬기게 됩니다. 참으로 치욕적인 역사입니다.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는 조선의 건국 초기부터 사대 정책으로 명나라를 대했으며, 태조가 요동 수복 운동을 벌이면서 잠시 대립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태종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즉위 후, 명나라와 친선관계를 유지하여 활발한 경제와 문화교류가 활발했다고 합니다. 


새나라 조선 왕조의 건립


일본과의 관계

조선은 건국한 뒤 줄곧 왜구 지금의 일본 때문에 많은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왜냐하면 틈만나면 해안가 마을들을 습격해 노략질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이를 심각하게 여긴 왕 세종대왕은 이종무라는 장군을 보내 조선에 침략한 왜구들을 소탕했다고 합니다. 이후로 왜구들의 약탈로 크게 줄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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